매 주, 영어와 한어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회복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시게 되시길 소망합니다~
Every week, the preaching is being preached in Korean as well as English. Hoping that you would richly experience the restoring grace of God through the message~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That He Might Bring Us to God
설교자: 오수강 목사, Pastor Richard Oh
본문: 베드로전서 3:17-20, 1 Peter 3:17-20
날짜: 2021-06-06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3:17-20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서론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베드로전서 3장 17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지난 주일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하는 데 열심을 내는 것 -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선한 사랑을 반영하고, 악과 거짓을 삼가고, 악에서 돌이켜 도덕적으로 선한 일을 하는 것 - 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우리를 해하도록 자극하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 사이의 선의를 촉진하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것이 사실인 것을 아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양심'이라는 선물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양심 때문에 길을 잃어 믿지 않는 죄인들조차도 선을 행한 사람들에게 선으로 갚는 것이 옳다는 것을 이해하며, 그들도 종종 이 규율에 따라 행동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눅 6 : 32-33) 따라서 불신자들은 복음을 거역하더라도 신자의 선한 행실은 선한 행실로 다시 갚아야한다는 양심의 제약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은 그들을 선하게 대하는 신자들에 대한 적대감을 억제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지난주 본문의 첫 번째 구절에서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라고 질문했습니다. 물론 팀 켈러 목사님이 말했듯이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 분의 기준에 대한 진리를 억누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양심 자체는 당연히 결함이 있고 뒤틀려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양심의 지시를 위반하고, 잘못된 일임을 알면서도 그대로 행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하려는 열심은 사람들에게서 당하는 학대와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하기 위해 사람의 손에 당하는 고난을 인내 할 때, 그들이 두려워하는 분이 사람이 아닌 오직 하나님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지난주 메시지에서 우리는 주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사는 것은 거듭난 사람 만이 할 수 있는 일이므로 주님을 두려워하여 의를 위해 고난을 견디는 사람은 참으로 거듭나 진정으로 구원받는 믿음을 가졌다는 충분한  증거를 가진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들은 언젠가는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고린도 후서 4:17)를 받게 될 것이라는 큰 확신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계속해서 ‘고난 가운데서도 행하는 선’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첫 번째 요점으로 돌아가서 본문의 말씀을 함께 상고하길 원합니다. 

 

1. 주님의 징계 (17절)

 

오늘 본문의 첫 번째 구절은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라고 말합니다. 악을 행했기 때문에 고난받는 것도 신자들에게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낫습니다. 악을 행한 신자의 고난은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한 것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될 징계를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강해 앞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될 심판'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벧전4:17)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된 심판은 정죄하는 심판이 아니라 그분의 자녀를 죄로부터 깨끗게 하여 거룩하게 하고 하나님의 징계를 포함하고 있는, 우리를 정화하는 심판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1:31-32)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판단하는 것을 게을리하고 의식적이고 고의적인 죄를 고집하고 회개를 미루어 악한 양심으로 살기를 선택한다면, 그들은 고통스러운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될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에게 분명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히12:11)

 

주님의 징계의 심판은 그 분의 거룩함 가운데 살며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하기 때문에 신자들에게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징계를 경험하는 것도 귀한 가치가 있지만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훨씬 더 나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2:20-21)

 

의를 위해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촉발되는 하나님의 징계와는 대조적으로 의를 위해 고난받는 것은 주님 앞에 아름답습니다. 그분이 앞에서 선한 일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은 주님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을 나타내며 우리 마음 가운데 그 분이 가지신 최고의 가치를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고난을 겪을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더욱이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라는 우리의 소명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2:21)  그리스도께서 선을 행하심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23절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17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선을 행하기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때가 있는 것입니다. 

 

2. 주님의 고난의 본보기 (18절)

 

본문 18 절은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어성경으로 이 말씀을 살펴보면 ‘의인'은 단수형으로 쓰여졌고 ‘불의한 자'는 복수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의로우신 단 한 분이시며, 십자가에서의 희생으로 불의한 자들을 대신하여 죄의 대가를 치르 셨습니다. 그 분께서 죄로 인해 단번에 고난 받으셨다는 것은 곧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으로써 우리 죄의 대가를 온전히 치르시고 갚으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요 19:30). 의인이 불의한 사람들을 대신하여 죄값을 전부 치르시고 죽으셨습니다. 의로우신 주님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불의한 사람들의 죄를 위해 고난받으셨습니다. 원어성경으로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라는 문구는 ‘프로사고'라고 합니다. 이 단어의 뉘앙스와 관련하여 존 맥아더 목사님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고전 그리스어에서 명사 형태는 서론을 만들 때 쓰입니다. 고대 법정에서는 일부 관리들이 왕에 대한 접근을 통제했습니다. 관리들은 그들이 왕을 알현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지 확인하고 그 사람을 군주에게 인도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제 믿는 자들을 위해 그 역할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존 맥아더)

 

명사 형태로 기록된 “프로사고"는 로마서 5장 2절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여기서는 “들어감”으로 번역됩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롬 5 : 2) 맥아더 목사님과 마찬가지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도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사람들이 법정에서 '소개'되는 것에 대해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와 거의 같은 의미입니다. ‘프로사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아무나 여왕에게 접근 할 수 없습니다. 특정 형식과 절차를 거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권한을 가질 수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법정에서 ‘소개'를 받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씁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를 하나님께 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는 그 분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 많고 사악하며 오염되었습니다. 우리의 의는 '더러운 걸레'와 같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 안에는 칭찬받을만한 것이없고, 우리의 의복은 합당하지 않고 부적합하며, 우리 자신의 이름으로는 들어가도록 허용해달라고 요청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권한을 주시고 우리가 들어갈 ‘문' 그 자체이신 분이 여기 계십니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해주실 수 있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를 소개해주시는 분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로마서)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주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해주시려고, 우리를 위해 성취하시고 완성하신 일로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자들처럼 만들어주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신 의로우신 주님으로 인해 죄로부터 깨끗함을 받고, 의로우신 주님의 완전한 순종으로 옷입게 된 우리를 주님께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주시며, 영원히 그 분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우리를 소개해주십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벧전2:5)

 

우리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기 위하여 죄인들의 손에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하는 것은 때때로 죄인의 손에 당하게 되는 고통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이 아닌 주님 한 분을 두려워하면서 그 분의 의로운 뜻을 계속 행할 때 우리는 구주의 발걸음을 따르게 되는 것이며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성취하게 됩니다.

 

3. 주님의 권속이 받게되는 고난 (verse 18 – 20)

 

18절 후반절에서 우리는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몸과 부활하신 몸의 차이가 강조됩니다. 육과 영의 대조는 신학자 웨인 그루뎀이 지적한 것처럼 “...이 세상에 속한 육체적이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하늘의 '영적'세계에 존재할 수있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대조에 관한 것이며 내세에 관한 것입니다. .” (웨인 그루뎀, 베드로전서) 예수님께서 “영으로 살리심을 받으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의 영원한 본성, 영화롭게 되신 본성을 가리 킵니다. 주님의 부활하신 몸은 이 땅 위의 생명체나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육체와는 불멸의 몸이십니다. 세상이 존재하기 전부터 영원 전부터 계셨던 것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에 하나님께 드리신 기도에서 “ '하늘의 영적 세계와 다가올 시대”에서의 그 분의 삶을 언급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17:5)

 

오늘 본문에 따르면, 성육신 하시기 이전에 노아 시대에 고대 세계의 악한 사람들에게 설교하신 분은 바로 주님이셨습니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이 사람들은 홍수로 죽었고 그들의 영혼은 이제 지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지금 감옥에 있는 영이 된 노아 시대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교 하셨는가? 주님은 노아의 입술을 통하여 그들에게 설교하셨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5절에서  우리는 노아가 “의를 전파하는 자'라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고대 세계의 사람들은 노아의 입으로 선포된 그리스도의 의로운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방주가 준비되는 동안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세상에 대한 심판을 보류하시고 인내하시며 기다리 셨다는 본문 20 절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 사이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는 이 때 하나님은 불경건한 세상에 대한 심판을 인내하시며 보류하고 계십니다. 베드로후서 3장 4-9절의 말씀을 읽어봅시다. 

 

“...5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3:4-9)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 시대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구원을 위해 작정된 사람들은 소수가 될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7:13-14) 

 

오직 소수만이 거듭납니다. 오직 소수만이 그리스도께로 향하고 구원받는 믿음과 애정을 가지고 그 분을 신뢰합니다. 오직 소수만이 주님을 경외하며 그들의 마음 가운데 거룩하신 주님을 높입니다. 오직 소수만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하나님께 드리신 바 되며 그 분의 거룩한 제사장으로 그 분께 소개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속은 결코 세상의 주류에게 인정받고 수용받는 것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권속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이방인으로 사는 것을 기대해야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선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권속은 이 세상 사람들과 친밀한 유대를 맺는 것을 기대해서는 안되며 그것을 원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집에 속한 모든 사람이들은 이 세상에서 망명자이며 나그네들이나, 이 땅에 닥칠 심판과 멸망의 날에 우리는 안전할 것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우리만이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오직 구원받은 하나님의 권속만이 하나님 앞의 제사장으로 거룩하게 되어 그 분께 나아갈 수 있으며 지금 그리고 영원히 그분을 섬길 수 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That He Might Bring Us to God

 

1 Peter 3:17-20

 

17 For it is better to suffer for doing good, if that should be God's will, than for doing evil.

18 For Christ also suffered once for sins, the righteous for the unrighteous, that he might bring us to God, being put to death in the flesh but made alive in the spirit, 19 in which he went and proclaimed to the spirits in prison, 20 because they formerly did not obey, when God's patience waited in the days of Noah, while the ark was being prepared, in which a few, that is, eight persons, were brought safely through water. 

 

Introduction 

 

I would like to remind everyone that we are continuing on with our series in 1 Peter picking up where we left off last week in the third chapter of this epistle, moving on to verse 17-20. 

 

If you recall, in our previous text, we learned that being zealous for doing what is good in God's sight – reflecting God's beneficent love in our treatment of people, refraining from evil and deceitful speech, turning away from evil and doing what is morally good – will not normally provoke people to harm us but will rather promote good will between ourselves and others. And the reason we can expect this to be the case is because of God's gift of the conscience to all people. Because of the conscience, even lost, unbelieving sinners understand that it is right to repay those who do good unto them with good, and they will often act accordingly. As Jesus declared, “If you love those who love you, what benefit is that to you? For even sinners love those who love them. And if you do good to those who do good to you, what benefit is that to you? For even sinners do the same.” (Luke 6:32-33) So, even if they oppose the gospel, they are constrained by their conscience to repay the good conduct of the believer towards them with good conduct. Their God-given conscience acts as a restraint upon their hostility towards believers who treat them with goodness. That was why the apostle Peter queried in the first verse of last week's text, “Now who is there to harm you if you are zealous for what is good?” Of course, because the unbelieving “'suppress the truth' about God, and about his standards”, as Tim Keller put it, their conscience itself is naturally flawed and warped. Plus, people violate the dictates of their conscience and do what they know to be wrong. Therefore, zeal for doing what is good in God's sight is no guarantee against mistreatment and suffering at the hands of people. But when believer's endure suffering at the hands of people for the sake of doing what is right in God's eyes, they are demonstrating that it is God whom they fear, not man. We learned in last week's message that living in the fear of the Lord is something only those who are born again do so those who endure suffering for righteousness' sake out of their fear of the Lord have presumptive evidence that they are indeed born again and possess the affection of true saving faith. They attain great assurance that they will one day be blessed with “an eternal weight of glory far beyond all comparison” (2 Corinthians 4:17). 

 

In today's text, we are continuing on with the theme of doing good in the face of suffering. So, let's now turn to our passage and begin unpacking its teaching as we turn to our first point. 

 

Point 1 – The chastisement of the Lord (verse 17)

 

The first verse of today's text reads, “For it is better to suffer for doing good, if that should be God's will, than for doing evil.” To suffer for doing evil holds value for believers. But it is better for believers to suffer for doing good. The believer's suffering for doing evil refers to the chastisement they can expect from God for doing what is evil in His sight. Earlier in this series, we had discussed the judgment of God towards His own household: 

 

17 For it is time for judgment to begin at the household of God; and if it begins with us, what will be the outcome for those who do not obey the gospel of God? (1 Peter 4:17) 

 

This ongoing judgment of God's own household is not a condemning judgment but a purifying judgment which sanctifies His children of sinfulness and includes His disciplinary chastisement: 

 

31 But if we judged ourselves truly, we would not be judged. 32 But when we are judged by the Lord, we are disciplined so that we may not be condemned along with the world. (1 Corinthians 11:31-32) 

 

When believers neglect to judge themselves by God's word, choose to live with a bad conscience by persisting in conscious, willful sin, and postpone repentance, they can be certain that they will suffer the painful correction of God's discipline. But, this is of value to them: 

 

For the moment all discipline seems painful rather than pleasant, but later it yields the peaceful fruit of righteousness to those who have been trained by it. (Hebrews 12:11)

 

It is of value to them because it trains them to share His holiness which“yields the peaceful fruit of righteousness”. But, as valuable as it is to experience the chastisement of God, our text tells us that it is better to suffer for doing good. 

 

20 For what credit is it if, when you sin and are beaten for it, you endure? But if when you do good and suffer for it you endure, this is a gracious thing in the sight of God. 21 For to this you have been called, because Christ also suffered for you, leaving you an example, so that you might follow in his steps. (1 Peter 2:20-21) 

 

It is better to suffer for righteousness' sake because to do so is “a gracious thing in the sight of God”. It is pleasing in His sight in contrast to the chastisement of God which is prompted by His displeasure towards our disobedience. To suffer for doing what is good in His sight demonstrates our fear of the Lord and testifies to people of His supreme worth in our hearts. God is positively glorified when His children suffer for the sake of doing what is pleasing in His sight. 

 

Furthermore, to suffer for doing what is good in God's sight is fulfilling our calling to follow Christ's example. “For to this you have been called, because Christ also suffered for you, leaving you an example, so that you might follow in his steps.” (1 Peter 2:21) It was God's will for Christ to suffer for doing good. We read in Acts 2:23 that Jesus was delivered up to the cross, “according to the definite plan and foreknowledge of God”. So, as verse 17 of our text points out, there are times when it is God's will for us to suffer for doing good, following in Christ's steps. 

 

Point 2 – The suffering example of the Lord (verse 18) 

 

We read on in verse 18, “For Christ also suffered once for sins, the righteous for the unrighteous, that he might bring us to God,” In the original Greek, “the righteous” is in the singular while “the unrighteous” is in the plural. Jesus is the righteous One, whose sacrificial suffering on the cross paid off the penalty for sin on behalf of unrighteous people. That He suffered “once” for sins emphasizes that His suffering on the cross paid off the penalty for our sin in full. Moments before Jesus died on the cross, He declared, “It is finished,” (John 19:30). The righteous One died, He paid in full the penalty for sin on behalf of unrighteous people. The righteous One suffered for the sins of unrighteous people “that he might bring us to God”. In the original Greek, the phrase “he might bring” is prosago. In regards to the nuance of this word, John MacArthur writes: 

 

“In classical Greek the noun form refers to the one making the introduction. In ancient courts certain officials controlled access to the king. They verified someone’s right to see him and then introduced that person to the monarch. Christ now performs that function for believers.” (John MacArthur) 

 

The noun form of prosago is found in Romans 5:2 and is there translated as “access”. “Through him we have also obtained access by faith into this grace in which we stand, and we rejoice in hope of the glory of God.” (Romans 5:2) In agreement with MacArthur's analysis of the word, Martyn Lloyd Jones writes: 

 

“It is roughly the same idea as we have in the word which we use about people being 'presented' at Court. That helps to explain the access. You have no access to the Queen as you are. Certain formalities and procedures are essential before that becomes possible. There is a way whereby you can have access – you can be 'presented at Court', you can have an introduction.” (Martyn Lloyd Jones, Romans)

 

Lloyd Jones goes on to write: 

 

“What our Lord Jesus Christ does is introduce us to God. We cannot go to Him as we are. We are sinful and vile and polluted. Our very righteousness is but as 'filthy rags', says the scripture. We have nothing to commend us, our clothing is unworthy and unsuitable, and we have no right in our own name to ask to be allowed to enter in. But here comes One who has a right of access and entry Himself, who having dealt with our sins can take us and present us to God the Father. He introduces us.” (Martyn Lloyd Jones, Romans)

 

“For Christ also suffered once for sins, the righteous for the unrighteous, that he might bring us to God,” - that He might introduce us to God, having made us suitable and presentable to God by the work He finished for us. Cleansed from our guilt in sin by the suffering the Righteous One endured in our place and clothed in the perfect obedience the Righteous One fulfilled on our behalf, Jesus takes us into the presence of God and introduces us as priests devoted in service to Him forever. And so, “...you yourselves like living stones are being built up as a spiritual house, to be a holy priesthood, to offer spiritual sacrifices acceptable to God through Jesus Christ.” (1 Peter 2:5) 

 

Our Lord suffered at the hands of sinners for the good of carrying out His Father's will for our salvation. Doing what is good in God's sight will sometimes lead to our own suffering at the hands of sinners. But when we persist in doing His righteous will nonetheless, fearing Him and not man, we are following in the steps of our Savior and fulfilling God's calling for our lives. 

 

Point 3 – The exilic suffering of the Lord's household (verse 18 – 20) 

 

From the latter half of verse 18, we read, “...being put to death in the flesh but made alive in the spirit,”. Here the difference between the body of Jesus' incarnation and the body of His resurrection is emphasized. The contrast between flesh and spirit, as Grudem points out, “...is a contrast between physical, visible things which belong to this present world and invisible things which can exist in the unseen 'spiritual' world of heaven and the age to come.” (Wayne Grudem, 1 Peter) Jesus being “made alive in the spirit” is referring to the eternal, glorified nature of Christ's resurrected body. His resurrection body, unlike the body of his earthly life and crucifixion, is not mortal flesh. The risen Christ lives eternally, as He has lived since eternity past, before the world existed. Jesus referred to His life in the “'spiritual' world of heaven and the age to come” in His high priestly prayer shortly before His crucifixion: 

 

5 And now, Father, glorify me in your own presence with the glory that I had with you before the world existed. (John 18:5)

 

According to our text, it was in His pre-incarnate, heavenly existence, that Christ preached to the wicked people of the ancient world in Noah's time. 

 

19 in which he went and proclaimed to the spirits in prison, 20 because they formerly did not obey, when God's patience waited in the days of Noah, while the ark was being prepared, in which a few, that is, eight persons, were brought safely through water. (1 Peter 3:19-20)

 

These people have since perished in the flood and their spirits are now imprisoned in hell. But how did Christ preach to the people of Noah's time who are now spirits in prison? He preached to them by the mouth of Noah. In 2 Peter 2:5, we read that Noah was a “herald of righteousness”: 

 

5 if he did not spare the ancient world, but preserved Noah, a herald of righteousness, with seven others, when he brought a flood upon the world of the ungodly; (2 Peter 2:5) 

 

The people of the ancient world did not listen to Christ's righteous word proclaimed by the mouth of Noah. We read in verse 20 of our text that God patiently waited, holding back His judgment on the ungodly world, while the ark was being prepared. In these last days, this final age of history between Christ's ascension and His return, God is patiently holding back His judgment on the ungodly world. We read in 2 Peter 3:4-9: 

 

4 They will say, “Where is the promise of his coming? For ever since the fathers fell asleep, all things are continuing as they were from the beginning of creation.” 5 For they deliberately overlook this fact, that the heavens existed long ago, and the earth was formed out of water and through water by the word of God, 6 and that by means of these the world that then existed was deluged with water and perished. 7 But by the same word the heavens and earth that now exist are stored up for fire, being kept until the day of judgment and destruction of the ungodly.

 

8 But do not overlook this one fact, beloved, that with the Lord one day is as a thousand years, and a thousand years as one day. 9 The Lord is not slow to fulfill his promise as some count slowness, but is patient toward you, not wishing that any should perish, but that all should reach repentance. (2 Peter 3:4-9) 

 

Nonetheless, as in Noah's time, those appointed for salvation will be the minority in the world. “Enter by the narrow gate. For the gate is wide and the way is easy that leads to destruction, and those who enter by it are many. For the gate is narrow and the way is hard that leads to life, and those who find it are few.” (Matthew 7:13-14) Only a minority are born again. Only a minority turn to Christ and trust in Him with the affection of saving faith. Only a minority live in fear of the Lord and in their hearts, honor Him as holy. Only a minority are made presentable to God by Christ's saving work and are introduced to Him as His holy priests. Therefore, the household of God should never expect mainstream acceptance. They should always expect to live as exiles in this world, regarded as strangers by this world. Despite the goodness of their lives in the fear of God, they should never expect to find fellowship with those who are of this world, nor should they ever desire it. But although all who are of God's household are exiles in this world, we alone will be conducted safely through the day of judgment and destruction which will fall upon this earth. We alone have been made acceptable and presentable to God through the saving work of Christ on our behalf. We alone have been sanctified as priests unto our God, able to approach Him and serve Him now and fore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