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
여호수아 1:6-9
6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새해가 되었습니다. 올해도 믿음으로 승리하시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한 해가 되시기 축원합니다.
오늘은 새해 첫 주일인 만큼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주제를 갖고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우리 교회에 젊은 세대를 생각하며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어른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같이 나누려는 주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대해 묻습니다. 특히 새해를 시작하는 마당에 각자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이 무엇일지 기대를 갖습니다. 오늘 제가 나누려는 내용은 “이것이 올해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라고 말하려는 의도가 전혀 아닙니다. 많은 크리스찬들이 “하나님의 뜻”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갖고 있습니다. 잘못이란 말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말입니다. 크리스찬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가 성경적이지 않은 개념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새해 첫 주일에 성경에 근거한 하나님의 뜻을 함께 찾고자 합니다. 그럴 수 있다면 우리 각자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잘못된 이해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과 별개의 것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하나님의) “뜻”을 어려운 말로 “관념”이라고도 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생각 속에 관념으로 따로 자리하고 있고, 우리는 하나님 보다는 그 관념에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관념(idea)이 무엇인지 짧게 얘기하겠습니다. 가장 쉽게 말해서, 관념이란 우리의 의식 속에서 형성되는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런 관념이 원래 별도로 존재한다고 여겨왔습니다. 마치, 진리, 사랑, 정의, 선, 영원, … 등등의 관념들이 원래부터 존재한다고 말입니다. 이런 관념을 갖는 것이 사람들에게 유익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진리”가 있다고 믿어서 진리를 찾고 탐구하기 원했고, 누구에게나 공통된 “선”이 있어서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었고, 잘은 모르지만 “영원”이 있어서 이생에서 바르게 살아야 할 동기가 되는 등의 좋은 기능도 있었습니다.
대부분 인간이 설정한 관념이 좋은 기능을 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대체로 선한 것을 추구하고, 나쁜 것을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과 무관하게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관념이라고 불렀습니다.
문제는 하나님도 이 관념을 따라야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들은 “선”이 원래부터 있어서 하나님이 이 선을 지키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하다는 겁니다. 어떤 문제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선을 지키시기 때문에 선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선인 겁니다. 하나님 한 분 만 선하시고(막 10:18), 그분이 하시기 때문에 선한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뜻도 관념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증거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그 “뜻”을 말할 때, 그 “뜻”이 나의 운명을 지배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고는 하나님을 몰랐을 때도 있었습니다. 운명, 팔자, 자연의 순리, 하늘의 이치, 등은 익숙한 말들 아닙니까? 이것은 모두 숙명론적인 사고입니다. 뭔가가 이미 나의 운명을 지배하는 것이 있어서 우리는 그 운명을 알기를 원하고, 바꿀 수 있다면 바꾸려고 애를 써보기도 하고, 바꾸지 못한다면 차라리 순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잘 될 때에는 그 “뜻”을 굳이 찾지 않습니다. 잘 안 될 때,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 생각을 합니다. 한국 사람은 “잘 되면 내 탓이고, 못 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이 있죠. 조상 탓이니 순응하고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숙명론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도 그런 일이 자주 발생합니다. 잘 되면 잊고 지나칩니다. 하나님이 되게 하셨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계획했던 일이 잘 안 되면, “하나님이 막으셨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말하는 걸 자주 보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자신이 문제가 있어서, 예를 들어 자신이 공부 안 해서 성적이 나쁘게 나오는 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는 것은 잘못이란 겁니다. 내가 게으르고 내가 죄를 져서 실패해 놓고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는 경우를 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 안 됐다는 것입니다. 그건 숙명론 입니다. 그건 하나님을 모르는 사고입니다. 하나님은 악의 조성자가 아니십니다.
왜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요? “뜻”과 “하나님”이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뜻이 별개로 존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뜻에서 하나님을 빼면 뜻이 따로 존재할까요? 하나님의 뜻이 중요한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지, 하나님에서 벗어난 “뜻”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죠!
예를 들어보죠. 여러분의 뜻이 여러분 자신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절대 그렇지 않죠. 나의 “뜻”이 바로 “나 자신”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뜻, 생각, 의지가 곧 나 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가 빠진 나의 “뜻”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뜻(생각) 자체가 인격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의 독립적인 추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격이 담겨있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곧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인격성(누구)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말씀, 계시, 성경, 율법, 등으로 주어져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신29:28).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둘로 구분하셨습니다. 하나는 “감추어진 뜻”이고 다른 하나는 “드러난 뜻” 입니다. 감추어진 뜻”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대신 “드러난 뜻”은 우리에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키고 행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감추어진 뜻”은 이런 것이 있습니다. 누가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을 것인가? 누가 구원 받을지는 우리에게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만 속한 일입니다. 그러니 전도하기 전에 누가 구원을 받을 것인가 따지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드러난 뜻”은, 신29:2에서는, 모세를 통해 주셨던 율법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하나님의 “드러난 뜻”인 겁니다.
이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이 관념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원래부터 따로 존재해 온, 그래서 하나님도 따라야 하는 관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우리에게 드러난 하나님의 뜻입니다. 신29:29 말씀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당신의 뜻을 모호하게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점쟁이에게 가서 물어야 하는 것처럼 비밀로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와 우리 후손이 분명히 알 수 있도록 드러내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늘 본문의 사건을 같이 이해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조상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약속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에게는 매우 큰 과업이 남아있습니다.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해야 합니다. 가나안 땅이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죠. 이스라엘은 거기에 살고 있는 모든 족속을 전멸해야 합니다. 전쟁을 해야 하는 거죠. 전쟁은 무섭고 겁이 나는 일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조상 때부터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드러나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따라 출애굽했던 것입니다. 이제 모세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불안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를 따라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이 여전히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십니다. “모세와 함께 했던 것처럼 너와 함께 할 것”이니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실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그냥 스스로 강하고 담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뭔가를 의지하고 따라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준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스스로를 볼 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 속에서 그들을 만나주셨고, 그들은 스스로를 강하고 담대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을 아는 한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2022년을 주시며 정복하게 하셨습니다. 승리할지 못 할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복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무서워합니다. 때로는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읽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더라도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읽고 경청한다면 하나님은 바로 그곳에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추상이나 관념이 아닙니다. 숙명이나 운명이 아닙니다. 점쟁이 한태 가서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2022년을 정복하시기 원하십니까? 승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시 신29:29을 읽습니다. 감추어진 뜻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드러난 뜻이 말씀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자손이 말씀 가운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코로나, 전쟁, 경제 등 우리를 두렵게 하고 떨게 하는 것들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전멸하고 정복하라고 하십니다. 승리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올해도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시며 강하고 담대한 신앙으로 승리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 축복합니다.